상단 왼쪽 이미지 상단 가운데 이미지 상단 오른쪽
 작성자   황윤선                                           일시 2003-12-22 00:25:51
  글제목  김완하 시인의 시를 보다.

Ⅰ. 시집을 보기 전.

선생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는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갔던 97년 가을이었다. 그날은 마침 10월 9일 한글날이기도 했다. 그 전년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지정한 공유일이었다가 마침 그 해 들어 이름뿐인 기념일이 되었다.

이제 막 국문학 개론서를 보았을 젖내 풀풀 나는 어린것들이 그렇게 된 내막이나 의미를 알았을까. 그저 공술 한 잔 얻어먹으려는 핑계로 선생님께 달려갔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제자이자 후배인 우리를 따듯하게 안아 주셨다. 선물로 시집 두 권을 받아들고 나왔는데, 그게 바로 선생님 첫 시집, ꡐ길은 마을에 닿는다.ꡑ와 두 번째 시집, ꡐ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ꡑ였다. 물론 그것으로 그날이 마무리 되었던 건 아니다.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가 어느 소주 집에서 잔뜩 취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문학이론을 들먹이며 시정신을 이야기 하고 어느 시인을 입에 올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 닳아오를 일이지만, 모두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선생님의 세 번째 시집, ꡐ네가 밟고 가는 바다ꡑ는 복학을 한 작년에 받았던 시집이다. 이렇게 선생님의 시집 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언제 한번 ꡒ고맙습니다.ꡓ 하고 말씀 드려 본 적도 없거니와 그보다, 시집을 사 찾아들고 선생님의 글월을 받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어린 나이의 소치려니 생각해도 내년이면 스물일곱을 바라보는, 한편으론 적지 않게 철들 나이에 그랬다는 점이 부끄럽다. 그런데도 어린 제자를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늘 온화하시기만 하니 그 또한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혹, 예법 모르는 청춘의 치기려니 생각하시고 그만 덮어주시는 눈치다. 거기에서 선생님의 시보다도 더 큰 감동이 이는 것은 아직 철들려면 멀었다는 기미인가.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시집을 가끔 생각날 적마다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 수를 세면서 보진 않았다. 그날 기분에 따라 제목을 살펴 페이지를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처음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날이 갈수록 난 늘 보던 곳을 되풀이해서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늘 같은 곳을 보면서도, 어제도 그 곳을 보았고 그제도 그 곳을 보았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시를 읽던 도중 딴 짓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소설이라면 가능해도 시를 두고는 할 수 없는 얘기다. 그럼 나는 늘 같은 페이지를 보면서도 왜 그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건 바로 시의 예술성에 있다. 같은 구절을 반복하여 되새김질 하면서도 늘 혓바닥에 닿는 그 감촉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얘기를 여기에 늘어놓으려 한다. 이건 감상문 성격의 글도 아니고 비평문은 더군다나 아니다. 가슴을 후려치며 달려들었던 시 구절을 습작지에 옮겨 놓으면서 그 아래 길게 늘여 제 감상을 적어놓는 식의 글쓰기다.

Ⅱ. 길은 마을에 닿는다.

백마강에서

저문 강에 비가 내린다.

강심 깊이 귀를 묻으면

잠들지 못한 울음 소리가 들린다.

강물에 번지는 신음 소리따라

젖은 풀잎 깨어난다.

그날 황산벌에 끓어오르던 함성

북소리 목놓아 울고

쫓겨온 장수 몇이 피를 헹구고 떠나간 후

빗물이 쌓여,

죽음을 끌어안고

모래알은 천만번 깨어나고 있다.

다짐하고 다짐해 봐도

억누를 수 없는 힘을 어이하랴

안으로 뜨겁게 흐느끼는 강 자락

장수의 칼날이 끊어 낸 몇 둥치 어둠이여

거센 물결은 거듭 일어서고

우리가 살아 있음으로 더욱 슬퍼지는 것을

또, 어이하랴

화자는 회한을 곱씹으며 백마강 기슭을 걷고 있다. 저 강물엔 빗줄기가 작은 동심을 그리고 수많은 동심이 겹치면서 물안개를 피운다. 화자는 거기 기슭에 쭈그리고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한 때는 백제의 영화가 저 강물을 수놓았고, 한 때는 폐장이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렸던 곳이다. 그 때 저 강과 함께 했던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 저 강은 홀로 서 있는 화자를 대면하고 있다. 말없이 조용히 흐를 뿐이다. 그러나 저 강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은 그렇지가 못하다. 가슴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울분이 솟아나고 그것은 급기야 거세게 일어나는 물결처럼 화자의 전신을 휘감는다. 그것은 억누르려고 해도 억눌려지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안으로부터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며 눈물이다.

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은 무엇이고 눈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서 꿈틀대는 역사를 왜곡시키고 전복시키는 권력자의 횡포에서 비롯되었다. 백제의 영광과 그 종말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백마강에서 화자는 그들 권력자의 횡포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바라봄만으로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억누를 수 없는 힘을 어이 하냐고 한탄하며 안으로 뜨겁게 눈물을 삼키는 것이다. 여기 이 땅에 살아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슬퍼진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자란 정치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구도 될 수 있다. 그에게 받은 상처는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저문 강가를 거닐어야 하고 강물에 번지는 신음소리를 따라 들어야 한다. 그제야 겨우 감추었던 자신의 본성이 깨어난다.

그러나 이 시는 절망에서 결말을 맺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 있음으로 더욱 슬퍼진다’ 말하고 나서 여운처럼 그러나 ‘또, 어이하랴’ 하고 뇌까린다. 언뜻. 탄식음처럼 들리는 ‘또, 어이하랴’는 말은 그러나 절망에서 비롯된 언어는 아니다. 거기엔 체념이면서 일반적 체념이 아닌 깊은 성찰에서 나온 불교적 체념이 엿보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체념이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을 보면서 화자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물과 의식 속에 흐르는 역사의 장면을 대비시키면서 화자는 깨달았다. 결국 모든 만물은 낳아서 자라고 익어서 떨어지는 것을. 거기에 체념 말고 무엇이 더 스며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체념은 건강한 체념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이성과 감성을 모두 훑어 나온 바로 그 체념이다. 그러기에 희망이 보인다. 그러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맞서서 피 흘리지 않아도 그것이 흘러가는 길을 내다볼 수 있다. 결국 태양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때때로 가리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 시는 애이불상(哀而不傷)한 기운이 느껴진다.

바닥이 깊다는 것,

물 빠진 뒤에야 알았습니다

드러난 갯벌에 서서

사방 팔방 흩어지는 게떼 속에서

다시 차오를 깊이를 봅니다

그 물의 무게를 느낍니다

물 나간 뒤

빈 바닥 위에서

두 섬도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대학(大學)에서는 평천하(平天下)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꼽고 있다. 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아 그것이 품고 있는 졸가리의 갈래를 제대로 알 수 있어야 치지(致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소개한 시는 바로 이러한 대학의 지혜를 그대로 이어받은 형상이다.

때때로 우리 인간들은 보지 않고 그것을 미루어 단정 지을 때가 있다. 남의 아픔을 미루어 단정하고, 남의 상처를 미루어 보듬고, 남의 어려운 환경을 미루어 짐작한다. 꼭 그것이 나쁘다 말할 순 없어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 인간은 매 생활 속에서 자동화된 무감각의 상태로 살아갈 때가 많다. 무얼 먹으면서도 무얼 보면서도, 그리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충실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신경을 분리하여 사용할 때가 있다. 옛날 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날 어느 암자에 어린 제자 중과 노승이 살고 있었다. 노승은 만사를 귀찮아해서 늘 누워있다가 제자 중이 밥을 해 들이면 그걸 먹고는 또다시 눕는 게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제자 중이 성이 나서 노승에게 달려들었다.

“스님은 하루 종일 누워있기만 하고 밥 해 올리면 그것만 잡수시곤 다시 누워있기만 하니, 어느 날에 소승을 가르치시려는지요.”

늘 조용하고 묵묵하던 제자 중이 갑자기 그렇게 대들자, 노승도 놀랐던 모양이다. 자리를 걷고 일어나더니,

“그렇게 일이 고됐더냐? 그럼 어디 한 번 바꿔서 해보자.”

그렇게 하기를 이틀도 지나지 않아, 제자 중이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소승의 성격이 워낙 비루(鄙陋)하여 그 높으신 대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하나에 집중한다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럴 때만이 우리는 살아 있음을 또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깨어있다는 자각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여기 소개한 시에서, 화자는 피상이 아닌 본상(本像)을 바라보고 있다. 만조일 때의 바닥 깊이는 피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이 빠진 뒤에라야 진정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또 그럴 때만이 거기에 차 오를 무게의 깊이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본래 하나였던 섬, 물이 차면 그것은 둘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실상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을 피상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저기 섬을 나누어 놓은 물을 넘어 그 실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자각할 수 있다.

동트는 계룡산

어둠 다 가고

보아라,

이 아침을 지고 일어서는 산

우뚝 일어나 나래치는 산

한 시대의 밤을 밀어내고

큰 산이 태어난다

계룡이 어깨 펴 깨어나고 있다

밤새 찬바람 몰려와

계곡마다 굳게 잠겨도

산봉우리 끝에서 반짝이는 별

그 별빛 하나씩 가슴에 품고

새벽 새 힘으로

젊은 산줄기 차오르고 있다

힘차게 굽이치고 있다

얼마나 먼 길이었던가

오늘 우리가 선 이 자리

열두 번 쓰러져 다시 일어선 비탈에서

백밤을 새워 하나로 달리는

길이 열린다

어둠 속 터오는 빛 위에

여기, 산 하나가 있다

우리 온 길 뒤돌아

어디, 가슴 아픈 일

묻어 아니 둔 곳 있으랴

새벽바람 일어

갈참나무 숲을 깨우고 간다

잠든 풀잎 하나도 흔들고 간다

우리 가슴 깊은 곳 때리고 간다

보아라

새벽 새 빛으로 솟아나는 산

계룡산 줄기들이

쇠북치며 한밭벌로 달려가고 있다

모든 산줄기 불러 깨워

큰 아침 열리고 있다

마치 서사시를 보는 것처럼 장중한 기운이 느껴지는 시다. 갓밝이 밀려오는 새벽, 거대한 산의 위용은 乾의 기운이다. 강직하다.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 화자는 그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산줄기만 바라보지 않는다. 산이 거대할수록 골도 깊은 것이다. 골은 결국 坤의 기운이라 할 수 있다.

산을 오르기 전 사람은 거대한 산줄기를 보지만, 일단 거기에 발을 들이면 밟는 곳은 골이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거기 깊게 패인 자국을 하나씩 체득하면서 결국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우리는 그걸 놓쳐선 안 될 것이다. 화자는 그걸 이야기한다. 갈참나무 숲을 깨우고 잠든 풀잎을 흔들고 가슴 깊은 곳을 때리는 행위. 거대함을 이야기하여 자칫 소외당할 수 있는 그러나 결코 없어서는 안될 것에 대해 일깨워 준다. 거대한 산은 바로 그러한 것들의 집적이고, 그것은 곧 삶의 비유가 될 수 있다.

여기엔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포부와 자신감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밟아온 길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그 애정 없이 삶은 뜨거워지지 않는다. 삶의 지락에서 순간 좌절을 떠올리는 행위는 단순히 나약성에서 비롯되는 기우는 아니다. 너른 식탁 위에 보리밥 한 덩이 올려놓고 그걸 곱씹는 행위를 결코 모순으로 바라볼 일만은 아닌 것이다. 때로 우리는 거기서 찬란히 빛날 미래를 생각하고, 혹은 생각했다. 포부로 가득 찬 화자가 새벽 거대한 산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찬양하면서도 잊지 않고 챙기는 골(谷). 그래서 이 시는 그대로 삶이 되며 너스레떠는 호들갑으로 비쳐지지 않는다.

Ⅲ.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

네가 빛나기 위해서

수억의 날이 필요했다는 걸 나는 안다

이 밤 차가운 미루나무 가지 사이

아픈 가슴을 깨물며

눈부신 고통으로 차 오르는 너,

믿음 없인 별 하나 떠오르지 않으리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하고

기다림 없는 들판에서는

발목 젖은 풀 뿌리 하나에도

별빛 다가와 안가지 않으리

어둠 속 무수히 흩어지는 발자국

별 하나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

고단한 하루에 빗장을 지를 때

지친 풀잎 허리 기댄 언덕 위로

너는 꺼지지 않는 등을 내다 건다

너와 내가 하나의 강으로 닿아 흐르기까지

수천의 날이 또 필요하리라

이 밤 네가 빛나기 위해

수억의 어둠을 뜬눈으로 삼켜야 했듯

그 눈물 어리러 흘러가는 강을 나는 본다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이란 구절이 나온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내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내가 절실히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온다. 안으로 자신을 굽어본 연후에야 비로소 피워낼 수 있는 언어다. 화자가 이야기하는 그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랑이다. 삶을 사랑하고 님을 사랑하고 우주만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다.

사랑 없는 시선은 어느 것도 간파할 수 없다. 보지만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거기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그저 서로 눈을 맞대고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흐르지 않는다. 거기서는 아무런 역사도 기대할 수 없다. 무어라 이야기하여도 들리지 않는다. 서로간 신뢰가 없는 상황에선 외면의 소리가 내면으로 들어와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은 한낱 바람이고 흩어져 사라지는 무의미한 언어의 찌꺼기다.

화자는 별을 보고 있다. 별과 화자 사이에는 무수한 역사가 내재해 있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만남과 헤어짐도 그렇다. 불교 식으로 말하면 거기엔 몇 겁의 세월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보면서도 그 둘의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수천의 날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데도 그들은 피상적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가식적인 웃음을 건넨다. 그들은 다가서지 못하고 서로 바라볼 뿐이다. 화자는 이를 안타까워한다.

이웃들을 대하는데도 우리는 몹시 서툴다. 함께 공부하는 학교 안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건조하기만 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 밤 네가 빛나기 위해 수억의 어둠을 뜬눈으로 삼켜야 했듯 그 눈물 어리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는 사람이 도무지 없는 세상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결국 자신의 삶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무수히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그 만나고 헤어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비로소 오롯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내 안에는 너의 삶도 들어있고 누구의 삶도 들어있다. 그 삶과 삶이 겹치면서 우리는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만남에 의미를 두지 못하고 상대를 바라보지 못하다면, 그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무엇을 건질 것인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봐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믿음 없인 저 별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하였다. 믿음은 곧 애정이고 그 애정은 이해를 품고 있다. 그것 없이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그 애정과 믿음으로 이 땅에 출현한 셈이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한 쪽으로만 기울어 있어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저 별을 바라봐야 한다. 저 별과 교통해야 하고 거기서 의미를 건져야 한다. 그러한 삶만이 진정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이다.

Ⅳ. 네가 밟고 가는 바다

발자국

너는 항시 뒤에 남아

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네 온기를 남김없이 길 위에 비운다

마을 하나에 닿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너의 목숨을

길 위에 뉘어야 하는가

어두워 집에 돌아온 밤

부르튼 발 씻으며

그제야 나는 바닥에 가 닿는다

돌아보면 내 몸 구석구석

네 그리움으로 커온 길이 있다

발자국이여,

네가 먼저 마을에 가 닿았구나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제 각기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 흔적은 결국 자신의 형상이며 자신의 본질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걸 잊을 때가 있다. 제 흔적을 잊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잃는 행위다. 이에 화자는 우리를 자각하게 한다. 무엇이 너의 실체고 네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화자는 흔적을 통하여 그 실체와 비롯됨을 일러준다. 발자국이여, 네가 먼저 마을에 가 닿았구나 하는 표현은 바로 그에 대한 절실한 비유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을은 무엇인가? 그 마을은 오랫동안 꿈꿔 왔던 피안의 땅일 수도 있고, 또 죽음일 수도 있다. 우리의 발자국은 본래 無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 이 땅에 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그럼 그 발자국을 들여놓기 이전의 그 발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죽음이다. 죽음은 없음이고 그 없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로 돌아가는 행위다. 그러기에 발자국은 늘 뒤에 있는 듯 하면서도 결국 앞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럴 수도 있고, 순간순간 삶에 대한 자각 없이 자동화된 일상을 이어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 하여도 발자국은 남는다. 또 그것은 어느 지점으로 귀결된다.

이러하다면 삶이란 무의미한 것인가. 삶이란 금방 새겨졌다 지워지는 발자국처럼 본래 의미 없는 것인 줄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통시론적인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공시적인 견지에서 보건데, 먼지 위에 새겨진 발자국마저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를 본다. 뻔한 줄거리에 뻔한 배우다. 그런데도 우리가 드라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작물은 또 그렇다 하자. 이미 역사 시간에 들어 그 전말을 확연히 알고 있는 역사극을 보면서도 우리가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건 드라마가 종래에는 한 인물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살아감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역시 다를 바 없다. 이미 우리의 발자국은 먼저 앞질러 저 쪽 마을에 닿아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화자는 이를 설명하고 있다. 마을 하나에 닿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너의 목숨을 길 위에 뉘어야 하는가. 그 많은 발자국들은 우리가 지내온 이력이다. 바람 한 번 불어버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위태로운 것이다. 그런데도 왜 화자는 거기서 발길을 멈추지 않는가? 종국에는 어느 마을에 닿을 것이지만, 그렇다 하여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발자국은 마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 닿기까지의 길에 맞추고 있다.

살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지는 시다. 결국 삶이 지향하는 바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칫 허무주의로 빠질 길을 사전에 차단한다. 그 것은 바로 마을이 아닌 길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 있다. 발자국 하나하나를 굽어볼 줄 아는 그 화자의 마음이, 거기에 마음을 쓰는 화자의 시선이 따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거기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하지는 않는다. 이 시의 매력이다.

Ⅴ. 시집을 본 후.

지금까지 선생의 시를 살펴보았다. 각 작품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선생이 기독교 신자라는 걸 안다. 그러나 선생의 시 세계에서는 뚜렷하게 기독교 신앙이 엿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선생의 시에서는 불교적 체험과 민속의 입김이 느껴진다. 비교적 젊었던 시절에 쓰셨을 ‘길은 마을에 닿는다’라는 시편에서도 젊은이의 치기는 없다. 아마 그래서 불교적 색채와 민속의 입김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선생의 시는 강직한 기운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강직이란 타협 없는 외골수가 추구하는 그 직선적 성품을 의미한다. 때때로 그것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서 그것은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이념 일반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름다움을 가장한 통합의 저해 요소일 수도 있다. 자연은 그렇지가 않다. 자연은 모든 걸 품으면서도 거기서 제 본성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은 조화가 있고, 만물을 길러낼 수가 있는 것이다.

선생의 시가 그렇다. 선생의 시는 강직한 기운이 아닌 어머니의 품처럼 대지의 너른 들판처럼 모든 걸 포용하고 수용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외유내강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는 선생의 성격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늘 타인을 향해 열린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면서도 선생의 시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애정, 그리고 선생의 철학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다.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물러나 멀리 떨어진 채로 파당하여 대적하지 않는다.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은 거기 안에 머물면서 그 곳에서 회자되는 모든 걸 수용하면서도 은근한 기운으로 감싸안아 결국 정도로 되돌려 놓는 인물이다.

선생의 시는 이러한 기품이 담겨 있다. 받아들이고 감싸안는 너른 마음자락이 느껴진다. 그러한 기품은 어느 일시에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성찰을 통한 연후에야 나타난다. 또 삶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인간애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기품이다. 선생의 시편 어느 구석에도 인간애가 없는 작품은 없다. 그러나 선생의 시편에서 엿보이는 인간애는 은근하다. 죽음을 담보로 불타오르는 그런 애정은 아니다. 그러다 한번 식어지면 싸늘하게 굳어버리는 애정은 더군다나 아니다. 은근하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애정이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 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서 비롯된다.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 없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때에라야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삶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

선생의 시는 일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별한 무엇을 끄집어 그것으로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선생의 시편이 이야기하는 그 언어는 일상적이지 않다. 거기에선 노승의 일갈이 느껴지고 순간순간 깨달음이 느껴진다. 결국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오롯한 삶이 될 수 있으며, 충성에 합당한 삶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충성이란 단어가 나를 향함에 있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타자를 향함으로 변질되었듯이, 우리의 삶도 나 대신 남이 운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척 하고, 항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러나 문제는 타인에 대한 의식이 자아성찰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만 타인에게 있어 나의 평판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충성함이 없다.

이러한 시대에 선생의 시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앞에서도 말했던 바, 선생의 시는 모든 걸 받아들인다.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이란 지극한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시는 받아들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뜨거운 삶에 대한 열정과 지극한 애정의 소산이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선생의 시편을 가슴에 묻어보자. 거기에 삶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우주와 만물이 보인다. 깎고 다듬어진 언어끼리 주고받는 그 첨예함을 느껴본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고향 언덕처럼 그것을 넉넉하게 감싸안는 포용의 미학도 느껴본다.  


 
글목록 글쓰기 글수정 글삭제
 

 Total:149    Page:( 15/9 )  
NO 글제목 작성자 작성일자 첨부 조회수
69 황윤선 2003-12-22 1286
68 시인의마을 2003-12-03 899
67 시인의마을 2003-12-03 873
66 시인의마을 2003-12-03 896
65 시인의마을 2003-12-03 839
64 시인의마을 2003-12-03 1022
63 시인의마을 2003-12-03 962
62 시인의마을 2003-12-03 886
61 시인의마을 2003-12-03 869
60 시인의마을 2003-12-03 897
[ [1] [2] [3] [4] [5] [6] [7] [8] [9] [10] [▶] [15] ]
글목록  글쓰기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