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리 들에서

김완하

깊은 시간의 옷 벗고

차가운 어둠의 날 부딪는 신영리 들

모든 것 떨친 뒤 시작되는

너의 음성 듣는다

처음 물줄기 길 헤매듯

잠시 불편한 음계 밟고 떨다가

이윽고,

무거운 껍질 가르고 튀어올라

스스로 일어서는 숨결

스며 흐르는 도랑물이 소리를 삼키면

둑 위로 언 손 마주잡은 포플러

굳은 약속 나누고

가까이 무너져 누운 오미봉

ㅅ위지 않은 눈빛 태우고 있다

갈라 터진 밭고랑 타고

뜨겁게 얼어붙은 발자국 찾아

갈대 허리 꺾인 밭머리,

헛발에 놀라 날아오르는 새떼

어둠 터는 나래짓에

바람이 따가운 흙살

깊이 박히는 통증에 발 저린데

마른 벌 적셔 오는 보리밭

보이지 않는 손으로 뻗어 내리는 용솟음은

채찍의 겨울에 맞서

몇 개 실뿌리 금가지만

쓰러지진 않으리

서릿발 사이 스며

숨가쁜 고요를 바람이 질러가는데

가벼운 건반 퉁기듯

더욱 새롭게 다가오는 목소리

밟히는 논두렁 돌아누워

한 장 홑이불로 몸 가릴 때

긴 밤의 꿈이 눈뜨지만,

아직 엄청난 소망도 한줌 어둠으로

시작과 끝이 몸 부비며

눅눅한 기다림에 젖어

돌아서는 벌판 끝으로

한 줄기 빛 싹트고 있다

(1984년 제11회 한남문학상 당선작)